전력

10년의 침묵 끝에, 두 나라가 동시에 말했다

영덕과 기장에 도장이 찍히던 그 주, 두산에너빌리티는 스웨덴 공장 개소식에서 미국 SMR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Mathew Rio기자
10년의 침묵 끝에, 두 나라가 동시에 말했다

이 기사의 핵심 3줄

10여 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다. 그 시간 동안 한국은 새로운 원전 부지를 단 한 곳도 확정하지 못했다. 탈원전 정책의 부침, 지역 사회의 반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에너지 정책 속에서 신규 원전 건설은 늘 '검토 중'이라는 단어 뒤에 머물러 있었다. 그 침묵이 6월 17일 끝났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신규 원전 부지선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대형 원전 2기는 경북 영덕군에,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1기는 부산 기장군에 짓기로 최종 확정한 것이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점, 태평양 건너 스웨덴의 한 공장 개소식 자리에서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스웨덴 알레이마(Alleima)와의 협력을 다지는 신공장 개소식에서, 미국 SMR 기업 뉴스케일파워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한 주 사이 한국 안에서는 10년 만의 결단이, 한국 밖에서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확장이 동시에 일어났다

영덕과 기장, 그 부지가 의미하는 것

이번 부지 확정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경쟁 구도다. 대형 원전 부지를 두고 영덕은 울산 울주를 제치고 최종 낙점됐다. 영덕은 과거 '천지원전' 예정지로 지정돼 부지 매입과 지질조사, 환경성 검토가 상당 부분 이미 진행돼 있던 지역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땅을 고른 게 아니라, 이전 정부에서 멈춰 섰던 절차를 다시 이어받은 셈이다.

SMR 부지를 둘러싼 경쟁은 더 치열했다. 경북 경주시와 부산 기장군이 맞붙은 끝에 기장군으로 최종 확정됐다. 기장에 들어설 SMR은 정부가 주도해 개발 중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이른바 i-SMR이다. 대형 원전이 1,000~1,700MW 규모로 한 번에 대규모 전력을 생산해 대도시의 기저 전원 역할을 한다면, SMR은 300MW 이하의 모듈 형태로 제작돼 산업단지나 데이터센터처럼 전력이 필요한 곳 가까이에 분산 배치되는 차세대 모델이다. 공기가 짧고 투자 부담이 작다는 점에서, 미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국토가 넓은 나라들이 송배전 비용을 줄이는 대안으로 주목하는 기술이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발 전력 수요 폭증이라는 분명한 동기가 있다. 전자신문은 이를 두고 "동해안권이 국내 원전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부상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건설업계도 즉각 반응했다. 사업비만 10조 원에 달하는 이번 프로젝트를 두고, 건설사들은 국내 일감 확대와 함께 "해외 사업 수주 신뢰 향상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자국에서 원전을 짓지 못하는 나라의 기술을 누가 믿고 사겠느냐는 단순한 논리다. 국내 부지 확정이 해외 수주의 신뢰도를 뒷받침하는 구조다.

스웨덴에서 만난 한국과 미국

같은 주, 더구루 보도에 따르면 두산에너빌리티는 스웨덴 알레이마와의 원전 사업 협력을 다지는 신공장 개소식 자리에서 미국 뉴스케일파워와 나란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알레이마는 원전용 특수 합금과 튜브를 생산하는 스웨덴 기업으로, 글로벌 원전 공급망에서 핵심 소재를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이 자리에 한국의 원전 주기기 제작사와 미국의 SMR 개발사가 함께 섰다는 것은, 한국 원전 산업이 이제 국내 발주처와의 관계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글로벌 행보는 이미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미국 AI 스타트업 xAI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370MW급 스팀터빈·발전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SMR 시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창원공장에 8,068억 원을 투자해 SMR 전용 제작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 5·6호기에는 5조 6,000억 원 규모의 주기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신한투자증권은 두산에너빌리티의 2026년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58.7% 늘어난 1조 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원전으로 돌아오는 이유

이 모든 흐름의 배경에는 미국 자체의 정책 전환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원자로 승인 절차 간소화, 원자력규제위원회(NRC) 개편, SMR을 포함한 차세대 원자로 기술 개발 가속화, 핵연료 국내 공급망 강화를 골자로 하는 4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2050년까지 미국의 원자력 발전용량을 4배인 400GW로 늘리겠다는 목표 아래, 기존 원전의 발전용량을 5GW 증설하고 2030년까지 대형 원자로 10기를 착공하라는 지시까지 에너지부에 내려졌다.

이 정책 전환이 한국에 기회로 연결되는 지점은 명확하다. 미국에서 1996년 이후 가동에 들어간 신규 원자로는 단 3기에 불과하고, 가장 최근 증설된 원자로 2기의 건설 비용은 최초 예산의 두 배인 350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미국은 원전을 다시 짓고 싶어 하지만, 예산 안에서 제때 짓는 노하우와 생태계는 충분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예산범위 내 적기 건설 노하우와 안정적인 생태계를 갖춘 나라로 평가받는다. 한 정책 보고서는 "우리나라와 미국이 원자력 진흥을 위해 협력하기로 할 경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짚었다. 미국이 원전을 다시 짓겠다고 선언한 것 자체가, 한국 원전 산업에는 수출 기회의 문이 다시 열렸다는 신호다.

두 결정이 만나는 지점

영덕과 기장에 도장이 찍힌 그 주, 두산에너빌리티가 스웨덴에서 미국 기업과 나란히 선 장면은 우연한 시점의 겹침이 아니다. 한국이 10년 만에 국내에 원전을 다시 짓기로 한 결정과, 그 원전을 지을 산업 기반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흐름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 국내에 원전이 없으면 해외에 팔 명분이 약해지고,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국내 투자의 정당성도 흔들린다. 이번 주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들려온 소식은, 이 두 축이 마침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10년의 침묵 끝에 나온 결정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영덕과 기장의 첫 삽이 실제로 땅에 꽂히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한국 원전 산업을 둘러싼 국내와 해외의 시계는 오랜만에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주목할 것: 영덕·기장 신규 원전의 착공 일정 구체화 여부, 그리고 두산에너빌리티의 미국 SMR 기업들과의 추가 협력 계약 체결 소식. 두 흐름이 동시에 가속화된다면 한국 원전 산업의 '내수-수출 선순환' 구조가 본격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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