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독하게 아름다운 인생의 한 때
왕가위는 사랑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아, 거기에 유통기한을 찍어놓을 뿐이다
조명이 꺼져도 관객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OCTANE》은 앨범이 아니라 그가 세운 무대다.

Don Toliver — 《OCTANE》 (2026, Donnway & Co / Cactus Jack / Atlantic)
싱잉 랩이 주류 사운드로 자리잡은 뒤 어느덧 시간이 지나 힙합은 다시 Rage로, 하이퍼팝으로, 디지코어로 합쳐지고 쪼개지며 새로운 서브 장르를 창조해냈다. 그 동안 Don Toliver는 한 장르에 편승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날카롭게 다듬는 데 집중해왔다. 2020년부터 꾸준히 1~2년 주기로 앨범 단위의 작업물을 발표해온 그는 《OCTANE》을 통해 왜 자신이 여전히 씬 최정상에 위치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인지 증명했다.
《OCTANE》에는 관통하는 메시지가 없다. 그런데 18곡을 순서대로 무대에 올려도 위화감이 없다. 마치 단독공연 현장에 있는 듯한 유기적인 이음새는 트랩, 알앤비, 아프로팝 등 다양한 장르를 이어준다. 아티스트의 퍼포먼스가 마치 Glue가 되어 개별 장르의 곡들을 이어붙여주는 듯한 인상이다.
그래서 오프닝부터 조명이 터진다. E85는 비유하자면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관객 앞에서 무대가 열리는 순간이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기타 테마, 완벽하게 맞물리는 reversed drum, 자기 목소리를 잘게 챱핑해 박아넣은 샘플링 포인트는 이 앨범의 온도를 예열하는 데 완벽하다. Body는 그 온도를 즉시 올린다. Justin Timberlake를 샘플링해 'Body'를 반복하며 라이밍을 맞춰가는 랩핑은, 그가 '래퍼'로 불렸을 때도 왜 당당했는지를 증명한다. 808과 신스 베이스, 잘게 쪼개지는 하이햇 사이에서 박자 하나 놓치지 않는다.
조연들의 등장도 완벽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Rendezvous는 Yeat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약물과 욕정의 찬가에 가장 적합한 페르소나를 무대로 먼저 불러내는 소름 돋게 영리한 수다. Secondhand에선 Rema와 아프로팝의 정수를 뽑아낸다. 손님을 부를 줄 알고, 주인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법도 안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혼자 쥔다. Tiramisu의 90년대 신스와 모던한 드럼, 가성과 진성을 오가는 보컬. Cardo와 Polo Boy Shawty가 깐 판 위에서 앨범 최고의 순간 하나가 독무대로 나온다. ATM은 정반대의 질감이다. 휴대폰 벨소리 같은 단순한 테마 위 synth lead, 중독성 있는 훅, 턴업하면서도 감미로운 감각. 이건 그가 Honorable C.N.O.T.E.와 함께 직접 프로듀싱한 트랙이다. 선공개 싱글 두 곡이 연달아 앨범에 배치되었음에도 그 어떤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백화점식 구성의 뱅어로 가득 찬 앨범과는 격을 달리한다.
이어서 Long Way to Calabasas가 무드를 떨어뜨리고, Rosary에서 Travis Scott이 들어온다. 언제 치고 들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이음새가 매끄럽다. 랩을 주고받던 올드스쿨의 맛을 현대 R&B 트랩으로 옮겨온, 익숙함과 새로움이 동시에 오는 순간이다. All The Signs에선 오랜 파트너 Teezo Touchdown이 롱노트와 서정적 코드로 눅눅해진 구간을 그대로 뒤집는다. 감성은 유지하고 리듬만 끌어올리는 이 배치가 프로듀서로서 Don Toliver의 진짜 실력이다. Call Back과 Tuition은 다시 독무대. 단순한 테마 위에 목소리가 얹히기만 해도 808은 더 세게 knocking하고 하이햇은 더 춤춘다. 코드가 늘어지든 서정적이든 턴업이든 상관없다. 그가 부르면 그의 순간이 된다.
후반부에 앞선 패턴이 되돌아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늘어짐은 지루함보다 앵콜에 가깝다. 구성도 믹싱도 마감도 흠 잡을 데가 없고, 끝나지 않길 바라는 청자에게 정확히 그만큼을 더 준다. Pleasure's Mine과 Sweet Home을 지나 앨범이 닫힌다. Sweet Home의 노스탤직한 신스 위 퍼포먼스는 화려한 퇴장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떠나가는 아티스트의 클로징 무대가 자연스레 그려지는 사운드다.
《HARDSTONE PSYCHO》부터 그는 앨범아트와 비트 셀렉션,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하나의 미감으로 묶어왔다. 《OCTANE》은 그걸 한 단계 밀어 올렸다. 실험복을 입고 장르를 조립하는 감각, 검은색과 흰색뿐인 아이코닉한 아트, 그 전부를 끌고 가는 장악력. Mount Wilson 천문대에서 녹음됐다는 사실마저 이 미감의 일부처럼 들린다. 어느 지점도 모나지 않았다.
조명이 꺼져도 관객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OCTANE》은 앨범이 아니라 그가 세운 무대다.
별점
★★★★☆ (4.0/5.0)
한줄평
"장르를 발명하지 않고도 장르 위에 서는 법. 올라운더의 찬란한 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