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총성 없는 분노. 한국형 멤피스의 탄생.

멤피스는 지역이 아니라 장르야 임마

Jaewan Park기자
총성 없는 분노. 한국형 멤피스의 탄생.

B-FREE — 《FREE THE BEAST》

비프리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커리어를 갖춘 힙합 아티스트다. 검증된 랩핑, 탄탄한 프로듀싱 능력, 앨범을 관통하는 메시징, 수록곡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엮어내는 능력, 균일한 질감으로 마감을 높이는 사운드 엔지니어링 역량까지. 소위 말해 육각형 아티스트다.

이미 '희망', 'KOREAN DREAM' 등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음악으로 풀어내 장르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냈던 비프리가 이미 검증된 길을 내려놓고, 날 것의 멤피스에 도전했다.

그저 그런 트래퍼, 그저 그런 기믹 랩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기존의 하드웨어, 이를테면 랩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플로우, 라이밍, 딕션 등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옷을 입는 데에 완벽히 성공했다. 이는 그의 간결하고도 날카로운 라이밍에 있다.

1번 트랙 '이번에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내 음악이 별로라고? 미쳤네 입원해', '필요한건 이미 내 안에 다 있었네', '겁에 질려 사는 게 훨씬 더 위험해' 같은 라인들은 일관된 라이밍을 이어가면서도 화자인 비프리의 철학을 굉장히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어려운 어휘, 화려한 라이밍없이도 유려하게 흘러가면서도 메시지를 청자의 뇌리에 박아넣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껏 분노한 상기된 분위기 속에서 느릿하게 흘러가는 드럼, 여유로운 라이밍과 대조되는 격앙된 톤은 그가 이 씬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인물인지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2번 트랙 '현상금 사냥꾼'으로 넘어가면서, 샘플링 테마를 소개하고 바로 트랩비트로 뒤흔드는 프로듀싱 능력, 불협인듯 아닌듯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현악, 괴성이 뒤섞인 보이스 샘플 등은 곡의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끌어올리지만 전혀 거북하지않다. '한국 힙합씬에 질렸어' '가요 랩에 질렸어' 따위의 식상한 메시징 없이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페르소나에 입혀 공격적이면서도 세련되게 드러낸다. 오랜 호흡을 맞춰온 콕재즈의 보컬파트 역시 분위기를 적절히 이어준다. 앨범의 사운드 미감 역시 인상적이다. 멤피스의 문법은 가져오면서, 공격적인 날카로움은 유지하되 철저히 제단되어있는 사운드는 '명반 제조기'라는 비프리의 타이틀이 그냥 만들어진게 아님을 입증한다. 마스터링을 칸예의 엔지니어이자 그래미 수상자인 Anthony Kilhoffer가 맡았다는 사실은, 이 균일한 질감이 우연이 아님을 이름 하나로 못 박는다.

3번 트랙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완급조절이 탁월하다. 2분 55초 구성 안에 날카로운 벌스, 멤피스의 문법에 충실한 카우벨의 활용, 벌스마다 격양되는 무드의 고조 등 완벽한 구성을 자랑한다.

4번 트랙 'DRACULA 2020'은 Playboi Carti의 화제작 《Whole Lotta Red》 수록곡 'King Vamp'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앨범이 그보다 한 달 앞서 발매됐다는 점에서 비프리의 탁월한 샘플링 감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한껏 고조된 감정은 '음모 2020'으로 이어지며 한국형 멤피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당시 씬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패기넘치는 신인 '권기백'을 첫 벌스에 배치하면서 음침한 안산거리를 그려내고, 한국에서 '멤피스의 삶'이 있음을 자연스레 연출한다. 미국 힙합의 클리셰를 옮겨오는 것이 아닌,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삶의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존재함을 음악으로 표현함으로서 새로운 방법으로 시대정신을 그려낸다.

6번 트랙 '돈내 즉흥곡'에선 더욱 노골적으로 삶의 문제와 분노들을 드러내고, 욕망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Charity와 권기백을 함께 태워 그 날것의 감정을 여러 겹의 목소리로 증폭시킨다. 외설적인 표현과 분노, 샤우팅으로 가득찬 라이밍과 한껏 왜곡된 808 사운드는 청자를 의도적으로 불편한 지점으로 인도한다. 누군가에겐 부담스럽고, 듣기 싫은 말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분노하고, 누구나 좌절하고, 누구나 몸부림친다. 비프리는 그저 이 감정을 음악으로 가져왔을 뿐이며, 어쩌면 가장 힙합다운 방식이 아닐까?

7번 트랙 '휴식' 역시 던지는 메시지가 강하다. 첫 소절부터 '전쟁같은 인생, 살아남고 싶어 죽도록 일해'는 화자가 비프리이기에 더욱 와닿는다. 화자가 삶을 대하는 방식은 분노로 가득차있을지언정 철저히 '생존'에 맞춰져있다. 미국 힙합에서 흔히 다루는 'kill my opps' 등 복수를 다짐하고 타인에게 분노를 돌리는 방향과 다르게, 갱도 없고 총도 없는 한국에서 화자가 삶을 대하는 유일한 선택지가 '노동'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비프리에게 있어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예술'이 아닌 '생존'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청자가 이러한 화자의 삶에 가장 빠르게 몰입할 수 있도록 비프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

8번 트랙 '개새x'에서는 '모두 다 날 욕해, 왜 행복을 강조해'라는 라인부터 '내 이름 최성호, 아직 살지 한반도에'로 이어지는 치밀한 라이밍, 단호한 메시징은 계급의 사다리가 끊어진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고 있는 예술가의 절규처럼 들린다.

9번 트랙 '부활절'은 앨범 최고의 하이라이트다. 미친듯이 터지는 카우벨 사운드와 롱노트로 구성된 808, 둔탁하게 깨지는 스네어롤, 그 위에 기믹을 넘어 '삶의 태도'로 자리잡은 화자의 기세는 청자에게 끊임없는 도파민을 선사한다. 조연으로 먼치맨을 등장시킨 비프리의 감각 역시 탁월하며, 뭐든 할 수 있다는 메시징을 전달하면서도 사회를 비판하는 화자의 태도는 피쳐링 벌스에서도 이어지며 메시징의 유기성을 더한다. 무대에 서고, 음악을 만들 때가 곧 그에겐 매일 매일이 '부활절'인 셈이다.

10번 트랙 '구명조끼'에서는 갑자기 끊긴 듯한 무드 위에 PNSB의 라이밍이 춤을 춘다. 그간 가득찬 샘플링 구성으로 이어져오는 3~9번 트랙에서의 청각적 피로를 바로 씻어주면서도 흔히 말하는 '야마'를 고조시키는 최고의 배치다.

앨범 후반부는 분위기를 한번 전환하며, 짐승의 숨을 고른다. 11번 트랙 '퇴근시간'은 앞서 몰아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되 방향을 튼다. Dustyy Han을 태워 하루를 끝낸 자의 피로를 그리는데, 화자에게 '퇴근'은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존의 마디다. 미국 멤피스의 밤이 총과 약으로 채워진다면, 비프리의 밤은 노동으로 채워진다. 씬을 향한 포효가 결국 '먹고 사는 일'로 착지하는 이 지점에서, 앨범은 멤피스라는 껍데기를 벗고 한국이라는 맨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13번 '친구들 2016'에서 짐승은 마침내 얼굴을 든다. 분노로 무장했던 화자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2016이라는 숫자가 붙은 이유는 분명하다. 벼려온 날을 잠시 내려놓고 여기까지 함께 왔거나 떠나간 이름들을 부르는 이 트랙에서, '민낯'이라는 이 앨범의 진짜 주제가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난다. 14번 '변화', 15번 '무소식이 희소식', 16번 '내 옷에 피'로 이어지는 흐름은 그 얼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변해버린 자신을 응시하고, 소식 없음을 안도로 삼는 지독한 생존의 감각을 지나, 결국 셔츠에 묻은 피, 살아남기 위해 치른 값 앞에 선다. 분노에서 시작한 앨범이 회한을 거쳐 대가의 확인으로 흘러가는 이 감정의 낙차가, 후반부를 단순한 '순한 맛 마무리'가 아니라 서사의 착지로 만든다.

17번 '마무리'는 권기백과 Andy Plager를 나란히 세워 앨범을 봉합한다. 흩어졌던 분노와 회한을 한자리에 모으는 정리의 트랙이자, 화자가 이 난동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자리다. 그리고 마지막 18번 '설계'. 앨범을 여는 포효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이 제목 하나가, 뒤돌아보면 지나온 모든 광기를 재정의한다.

결국 이 앨범의 제목은 절반의 진실이다. 비프리는 짐승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짐승을 설계했다. 분노도, 불안도, 외설도, 왜곡된 808 하나까지 전부 계산된 자리에 놓였고, 그래미 엔지니어의 손을 거쳐 균일하게 마감됐다. 마지막 트랙의 제목이 하필 '설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멤피스라는 장르를 안산과 한강 위에 옮겨 심고, 그 광기에 노동과 생존이라는 한국의 골격을 끼워 넣은 이 지독한 정교함. 《FREE THE BEAST》는 야수의 포효가 아니라, 야수를 조립한 설계도다.

별점

★★★★☆ (4.0/5.0)

한줄평
"명반 제조기의 허물벗기, 분노와 불안으로 가득찬 민낯을 드러낸 떳떳함이 주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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