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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가 떠난 자리, 현대차가 채웠다

JVC, 후지필름, 세이코, 소니—40년간 월드컵 광고판을 지킨 이름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 한국 기업이 서 있다

Mathew Rio기자
소니가 떠난 자리, 현대차가 채웠다

이 기사의 핵심 3줄

스포츠 마케팅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지층이 있다. 누가 광고판에 이름을 올리는가는 그 시대 산업 패권의 지형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의 공식 스폰서 명단을 한 줄씩 읽어보면, 이번 대회가 그 지층 교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카타르항공, 중국의 레노버와 하이센스, 그리고 한국의 현대차·기아. 자리는 그대로인데 이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40년의 퇴장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월드컵 경기장 광고판은 일본 전자업계의 무대였다. JVC(니혼빅터)는 1982년부터 2002년까지 20년간 FIFA 후원사로 자리를 지켰다. 후지필름은 1982년부터 2006년까지 24년을 버텼다. 세이코는 1978년부터 1990년까지 4개 대회 연속 공식 시계로 이름을 올렸다. 소니, 도시바도 그 시절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2026년 대회 명단에는 이 이름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아사히신문은 6월 17일 이 현상을 분석한 기사에서 "왜 일본 기업은 제로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3개 대회 연속 일본 기업이 한 곳도 보이지 않는 이례적인 공백이다.

가전을 팔던 회사들, 더 이상 가전을 팔지 않는다

아사히신문이 짚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 전자업계의 사업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소니, 도시바 등 한때 세계 가전 시장을 주름잡았던 기업들이 TV·오디오 같은 완제품 가전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인프라·부품·시스템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도시바가 대표적이다.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스폰서였던 이 회사는 2010년대 가전 부문을 중국 하이센스에 매각했고, 지금은 송배전 설비와 사회 인프라 사업으로 수익을 낸다.

스포츠경영 전문가인 오이 요시히로 와세다대 준교수는 이 변화를 정확히 짚었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가치를 뒀지만 지금은 사업과 직접 연결되는 투자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월드컵 스폰서십은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게임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 소비자에게 직접 팔 가전제품이 없는 회사라면, 이 게임에 참가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효율을 중시하는 현실 노선이 강해지면서, 비용 대비 효과가 확실하지 않은 사업에 거액을 투입하지 않게 됐다"는 오이 교수의 진단은 일본 기업의 우선순위가 송두리째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엔저라는 환율 변수가 더해졌다. 월드컵 스폰서 비용은 달러 기준으로 책정된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계약을 갱신하는 데 드는 실질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2000년대 이후 버블 붕괴와 리먼 쇼크를 겪으며 장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일본 경제 사정이, 환율이라는 형태로 한 번 더 청구서를 들이민 셈이다.

현대차가 그 자리를 채운 방식

흥미로운 것은 한국 기업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경로다. 현대차의 월드컵 스폰서십은 사실 20년 넘게 누적된 전략의 결과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자동차 부문 스폰서 우선권은 본래 독일 오펠의 몫이었지만, 오펠이 아시아 대회의 방송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선권을 포기하며 현대차에 기회가 열렸다. 도요타도 도전했지만 "본사가 있는 도요타시에서 경기가 열려야 한다"는 비현실적 조건을 내걸며 스스로 탈락했다. 그 이후 전 대회 스폰서에게 우선권을 주는 관행에 따라 현대차는 2개 대회, 그리고 지금까지 스폰서 지위를 이어왔다.

이번 대회에서 현대차·기아는 FIFA의 최상위 등급인 Tier 1 글로벌 파트너로 분류된다. 아디다스, 코카콜라, 비자, 카타르항공, 아람코, 레노버와 같은 반열이다. FIFA에 따르면 2026 월드컵은 북미 3개국 공동 개최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영어권 최대 미디어 시장을 직접 겨냥했고, 이는 광고 단가와 시청률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효과로 이어졌다. FIFA의 스폰서십 수익은 전 대회 대비 37% 급증했고, 사실상 모든 스폰서십 재고가 완판된 상태다. 한국 기업이 자리한 그 슬롯의 몸값 자체가, 일본 기업이 떠난 시점과 정확히 맞물려 더 비싸졌다.

광고판 밖, 한국 거리의 열기

흥미로운 반전은 한국 시장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애초 업계는 한국 대표팀의 조별리그 경기가 평일 오전(체코전 오전 11시, 멕시코전 오전 10시)에 편성되며 월드컵 특수가 제한적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반응은 예상을 빗나갔다. 한 직장인은 체코전을 보기 위해 하루 연차를 냈고, "다음 주에는 광화문으로 나가서 응원을 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도 "생각보다 응원 열기가 뜨거워 놀랐다"며 당분간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유통업계의 마케팅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월드컵 공식 스폰서인 오비맥주 카스는 "월드컵, 우리들의 진짜가 되는 시간"이라는 광고를 내놓으며 거리 응원전 마케팅을 이어가고 있고, 롯데월드몰과 더현대 서울은 포토존과 팝업스토어로 체험형 마케팅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단순 노출형 광고에서,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고 소장하는 경험형 마케팅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흐름이다.

같은 무대, 다른 전략

결국 이번 월드컵이 보여주는 것은 두 겹의 전환이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일본 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를 한국·중국·중동 기업이 채우며 산업 패권의 지형이 바뀌었다. 동시에 국내 시장에서는 단순 노출이 아니라 체험과 참여를 파는 마케팅으로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현대차가 글로벌 광고판에서 누리는 위상과, 카스나 롯데가 광화문 거리에서 시도하는 체험 마케팅은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월드컵이라는 무대를 브랜드 노출의 자리에서, 사업과 직접 연결되는 투자의 자리로 재정의하는 흐름 말이다. 일본 기업이 먼저 깨달았던 그 교훈을, 이제는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따라가고 있다.

주목할 것: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와 그에 따른 거리 응원 규모. 16강 이상 진출 시 유통업계의 월드컵 마케팅 투자가 후반전에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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