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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완전정복 2 — 가격은 어떻게 매겨지고, 왜 일반 D램과 다른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D램과 AI 서버에 들어가는 HBM은 같은 '메모리'라는 이름을 쓰지만, 거래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다

Mathew Rio기자
HBM 완전정복 2 — 가격은 어떻게 매겨지고, 왜 일반 D램과 다른가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일반 D램의 세계 — 오르고 내리는 시장 가격

스마트폰이나 PC에 들어가는 일반 D램은 원유나 농산물처럼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진다. 대만의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같은 기관이 매달 D램 평균 거래가를 집계해 발표하고, 그 가격은 그때그때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출렁인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고, 수요가 몰리면 가격이 뛴다. 2026년 들어 D램 가격이 1분기에만 55~60% 급등한 것도 이런 시장 논리의 결과다. AI 서버 수요가 폭증하면서 메모리 제조사들이 생산 라인을 일반 D램에서 HBM 쪽으로 돌렸고, 그만큼 일반 D램의 공급이 줄어든 것이 가격 급등의 배경이었다.

이런 시장에서는 가격을 누구도 미리 확정하지 않는다. 오늘 계약을 맺는 사람은 오늘의 시세를 받아들이고, 다음 달에 계약을 맺는 사람은 그때 또 달라진 시세를 받아들인다. 메모리 회사 입장에서는 호황기에 많이 벌지만 불황기에는 가격이 급락해 손실을 보는, 전형적인 사이클 산업의 운명을 따른다.

HBM은 왜 다른 방식으로 거래되는가

HBM은 이 시장 논리에서 한 걸음 비켜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HBM이 '범용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 D램은 어느 회사가 만들었든 규격이 거의 같아서 서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HBM은 고객사(주로 엔비디아 같은 AI 가속기 제조사)의 요구 사양에 맞춰 세밀하게 설계되고, 공급사가 단 세 곳뿐이다. 거래의 단위 자체가 다르다. 일반 D램은 불특정 다수가 사고파는 시장이지만, HBM은 소수의 메모리 회사와 소수의 빅테크 고객사가 일대일로 만나 직접 협상하는 구조다.

게다가 지금은 만들어지는 물량 전체가 이미 팔려나가는 극단적인 공급 부족 상태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회사가 만들 수 있는 모든 HBM 물량이 이미 시장에서 소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2026년 생산분이 사실상 완판됐고, D램 공급 부족은 2028년까지, 낸드 공급 부족은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시장 전망도 있다. 만들기도 전에 다 팔리는 시장에서는, 현물시장에서 그날그날 가격을 매기는 방식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거래의 새로운 표준 — 장기공급계약(LTA)

이런 배경에서 자리 잡은 거래 방식이 장기공급계약, 흔히 LTA(Long-Term Agreement)라 부르는 계약이다. 과거의 LTA는 단순히 "이 정도 물량을 사겠다"는 수량 보장에 가까운 느슨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LTA는 차원이 다르다. 계약 기간, 확정 물량, 그리고 가격까지 미리 정해두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부터 1년 단위의 단기 공급 계약 방식을 사실상 폐기하고, 3~5년 단위의 장기공급계약만으로 제품을 공급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지난해까지는 분기 단위의 초단기 계약도 받아줬지만, 이제는 최소 3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마이크론은 한발 더 나가서 'SCA(Supply Capacity Agreement)'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LTA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태로 5년에 걸친 물량과 가격을 사전에 확정하는 방식이다. 마이크론은 이미 16건의 SCA를 체결했고, 이것만으로 회사 D램 물량의 20%, 낸드 물량의 33%를 차지한다. 전체 SCA가 마무리되면 마이크론 매출의 절반 이상이 이 계약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계약이 작동하는 방식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구조가 보인다. 마이크론의 SCA는 계약 체결 시점의 시장가를 가격의 상한선으로 정하고, 계약 기간 전체에 걸쳐 적용되는 하한가를 동시에 설정한다. 즉 고객사는 "이보다 비싸게는 안 사겠다"는 상한을, 공급사는 "이보다 싸게는 안 팔겠다"는 하한을 서로 보장받는 셈이다. 가격이 어느 방향으로 크게 흔들려도 두 회사 모두 일정한 범위 안에서 안정적인 거래를 이어갈 수 있다.

가격 결정권은 지금 누구에게 있나

이 거래 방식의 변화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한 시장 분석은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가격 결정권이 완벽하게 공급자에게 넘어왔다"는 것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AI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가격 흥정의 유연성까지 포기하고 물량 확보를 우선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힘의 이동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마이크론이 체결한 SCA 16건 중 14건만으로도 계약 기간 전체에 걸친 최소 보장 매출이 1,000억 달러에 이른다. 그리고 이 계약에 설정된 가격 하한선이 과거 어떤 호황기의 분기 최고 마진보다도 높은 수준이라고 회사는 밝혔다. 다시 말해, 지금 메모리 회사들이 받아내는 '최저 보장 가격'이 예전 '최고 호황기 가격'보다 더 높다는 뜻이다.

다만 이 LTA에도 변수는 남아있다. 계약 기간 중 시장가가 하락할 경우를 대비한 최저가격 보장 조항, 계약액의 일부를 미리 받는 선급금 지급 같은 세부 조건들이 협상 테이블에 함께 올라온다. 이 세부 조건이 어떻게 설계되느냐가 앞으로 메모리 회사들 사이의 점유율 경쟁에 영향을 줄 변수로 거론된다. 또한 공급 능력 자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메모리 회사들이 모든 고객사의 장기계약 요청을 다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SK하이닉스는 실적 발표에서 현재의 공급 제약상 모든 고객 요청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누구와, 얼마나 긴 기간의 계약을 맺느냐 자체가 이제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메모리에서 시작된 변화, 부품으로 번지다

이 장기계약이라는 거래 방식은 메모리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HBM과 서버용 D램의 공급 부족이 그 주변 부품으로까지 퍼지면서, MLCC(적층세라믹콘덴서)나 실리콘 캐패시터, 반도체 패키지 기판 같은 부품 시장에서도 비슷한 장기계약이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기는 글로벌 대형 기업과 2년 단위, 약 1조 5,000억 원 규모의 실리콘 캐패시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AI 서버는 반도체 칩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전력 안정화 부품과 고성능 기판이 함께 갖춰져야 하는데, 이 부품들 중 하나라도 공급이 끊기면 서버 자체의 생산과 출하가 멈출 수 있다. 그래서 빅테크와 서버 업체들은 핵심 부품들을 점점 더 단기 발주가 아니라 장기 확보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변화가 한국 기업들에게 의미하는 것

장기계약 중심으로 거래 구조가 바뀌는 것은 메모리 회사들에게 분명한 이점이 있다. 가장 큰 이점은 실적의 안정성이다. 과거에는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실적이 좋아지고 가격이 떨어지면 실적도 함께 무너지는, 전형적인 사이클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장기계약 비중이 커지면 불황기에도 미리 약속된 가격과 물량이 유지되기 때문에, 가격이 급락하는 시기에도 이익이 함께 급락하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생긴다.

투자 측면에서도 효과가 있다. 팔릴 물량이 이미 확정돼 있으니, 메모리 회사들은 무분별하게 설비를 늘리는 경쟁 대신 철저히 계산된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업계에서는 장기계약 비중이 높아질수록 메모리 기업들의 이익률이 과거보다 높은 수준에서 더 일정하게 유지될 것으로 내다본다.

삼성전자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회사는 2026년 1분기 실적 발표에서 고객사들의 요청에 따라 메모리 제품 장기공급계약을 추진하고 있으며, 일부 고객사와는 이미 계약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HBM 시장은 한 번 고객사 공급망에 들어가면 후속 세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즉 지금 어떤 회사와 어떤 조건으로 장기계약을 맺느냐가, HBM4 다음 세대인 HBM4E와 HBM5 시점의 경쟁 구도까지 미리 결정짓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일반 D램과 HBM의 가격이 매겨지는 방식이 다른 이유는, 결국 시장의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 D램은 누구나 사고팔 수 있는 범용 상품 시장이고, HBM은 소수의 공급자와 소수의 구매자가 직접 만나 다년간의 조건을 미리 정하는 협상 시장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협상에서 공급자가 유례없이 강한 입장에 서 있다. 만들기도 전에 다 팔리는 시장에서는, 파는 쪽이 가격과 조건을 정하는 쪽에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 구조가 영원히 공급자에게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금의 장기계약들은 공급이 부족한 시기에 맺어진 것이고, 시간이 지나 공급이 충분해지는 시점이 오면 협상의 무게중심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지금 맺어지는 3~5년짜리 계약들이 그 변화의 시점까지 양측 모두에게 합리적인 조건으로 남아있을지는, 앞으로 몇 년의 시장 상황이 답해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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