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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과 곡괭이 그 뒷이야기 - 식칼이 품절됐다, AI 공급망 변방의 역습

선두 기업들이 AI라는 금광을 향해 전 역량을 쏟아붓는 사이, 그들이 손을 뗀 자리에서 조용히 몸집을 키우는 기업들이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숫자로 증명하는 '변방'의 이야기

Mathew Rio기자
금광과 곡괭이 그 뒷이야기 - 식칼이 품절됐다, AI 공급망 변방의 역습

이 기사의 핵심 3줄

곡괭이 이론, 그다음 장

투자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다. 금광이 발견되면 너도나도 금을 캐러 몰려들지만, 정작 떼돈을 버는 건 그 옆에서 곡괭이를 파는 대장장이다. 금을 캘 확률은 낮아도, 곡괭이는 모두에게 팔리기 때문이다. 이른바 '곡괭이 이론'이다.

그런데 요즘 AI를 둘러싼 첨단 제조업 전반을 보면 이 이야기에 한 챕터를 더 써야 할 것 같다. 대장장이들이 너도나도 곡괭이 주문에 매달리기 시작하면서, 정작 마을 사람들이 저녁 준비에 쓸 식칼을 만들 손이 남아나지 않게 된 것이다. 식칼은 곡괭이보다 마진이 박하다. 그러니 대장간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문제는 식칼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지금 AI를 중심으로 한 국내 첨단 제조업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딱 이 모양이다. 선두 기업들이 AI라는 거대한 금광을 향해 전 역량을 쏟아붓는 사이, 그들이 손을 뗀 '식칼' 자리에서 조용히 몸집을 키우는 기업들이 있다.

사례 ① 파운드리 — DB하이텍, 비워진 8인치를 채우다

삼성전자와 TSMC는 스마트폰용 프로세서나 AI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드는 12인치(300㎜) 선단 공정에 집중하기 위해, 8인치(200㎜) 레거시 파운드리 사업을 빠르게 줄이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부사장은 올해 초 콘퍼런스콜에서 8인치에서 양산 중인 전력반도체·DDI·CIS 등을 순차적으로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전력반도체 수요가 오히려 늘고 있다는 점이다. 모바일·가전뿐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로봇, 자동차 등 전력 소모가 큰 산업군 전반에서 전력반도체를 찾는다. 이 틈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넘치는 물량이 DB하이텍으로 유입되고 있다. 그 결과 DB하이텍은 올 1분기 가동률 98% 수준을 유지했고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1% 늘었다. 판가 협상력도 덩달아 세져, 중국向 전력반도체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을 정도다.

사례 ② MLCC — 아모텍·삼화콘덴서, 범용 시장의 조용한 승자

같은 구조가 반도체와 밀접하게 맞닿은 전자부품 업계에서도 나타난다. 무라타제작소, 삼성전기 같은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선두 업체들이 AI 서버용 고부가 제품에 생산 역량을 집중하면서, 일반 전자제품에 쓰이는 범용 MLCC 공급이 빠듯해지고 있다. iM증권 연구원은 "선두 업체들의 보수적인 증설 기조를 감안하면, 넘치는 AI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범용 MLCC 생산 비중을 줄이고 서버향 배분을 확대하는 흐름이 불가피하다"고 짚었다. 그 반사이익을 국내 중소 MLCC 업체들이 누리고 있다. 지난 11일 아모텍은 MLCC 공급 부족 우려가 부각되며 상한가(29.98%)를 기록했고, 삼화콘덴서도 20% 안팎 급등했다. 두 회사 다 올 들어서만 비슷한 이유로 여러 차례 급등을 반복해왔다.

사례 ③ 메모리 — 이번엔 승자가 담장 밖에 있다

같은 구조가 반도체 대장주 자신의 제품 라인업 안에서도 벌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정된 웨이퍼 생산능력을 HBM과 서버용 D램에 우선 배정하면서, 정작 스마트폰·PC에 들어가는 소비자용 메모리(모바일 D램, PC D램, SSD)에서 품귀가 벌어지고 있다. 모바일 D램(LPDDR) 평균 판매가는 전분기 대비 89% 급등했고, SSD 평균가도 54% 뛰었다. 다만 이 사례는 앞의 두 사례와 결이 다르다. 그 공백을 메우는 주체가 국내 소외주가 아니라 애플 같은 완제품 업체의 부담, 그리고 그 부담을 파고드는 중국 후발 메모리 업체이기 때문이다. 선두가 비운 자리를 누가 메우느냐에 따라, 같은 구조도 국내 투자자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사례 ④ 전력기기 — 산일전기, 원래 안 보던 자리에서 자란 강소기업

산일전기는 앞의 세 사례와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다. 변압기 시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주력 제품군이 애초에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전압을 높이는 승압용 변압기는 LS일렉트릭·효성중공업·HD현대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이, 전압을 낮추는 강압용·특수변압기는 산일전기·제룡전기 같은 중소기업이 맡아왔다. 대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손을 뗀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대기업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자리에서 산일전기가 차곡차곡 전문성을 쌓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변방'이 스스로 커지기 시작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본격화하며 특수변압기 수요가 급증했고, 산일전기는 미국 블룸에너지로부터 503억 원 규모 데이터센터용 변압기를 수주하며 존재감을 키웠다. 여기에 154kV 초고압 변압기 시장 진출까지 시도하면서, 이제는 오히려 대기업의 영역을 역으로 넘보는 모양새다. 비워진 자리를 메운 게 아니라, 원래 자기 자리였던 곳이 시대를 잘 만나 커진 다음 대기업 영토로까지 번져나가는 경우다.

왜 이런 패턴이 반복될까

네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 배경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제조업 전반이 안고 있는 물리적 제약이다. 새로운 생산 설비를 짓는 데는 수년과 수조 원이 든다. 그러니 선두 기업이 고부가 영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면, 저부가 영역의 공급은 누군가 채워주기 전까지 구조적으로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AI 슈퍼사이클이 만든 이 쏠림은 일시적 해프닝이 아니라,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큰 패턴이라는 뜻이다. 다만 그 공백을 메우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말은 달라진다. DB하이텍과 아모텍·삼화콘덴서, 산일전기처럼 국내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투자자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지만, 소비자용 메모리 사례처럼 그 공백이 해외로 흘러가면 오히려 다른 산업(완제품 업체)에 부담이 되고 경쟁사(중국)에는 기회가 된다.

다음 '식칼'은 어디일까

이 틀로 시장을 보면, 지금 당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다음 기회를 찾는 접근이 가능하다. 다만 이런 반사이익형 종목에는 공통된 리스크도 있다. 선두 기업의 정책 변화 한 번에 구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범용 D램 가격이 급등하며 HBM과의 수익성 격차가 좁혀지자, 다시 범용 D램 생산 비중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변방의 호황이 선두의 '재진입' 한 번으로 다시 좁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패턴에 올라타려는 투자자라면, 단순히 '품귀'라는 단어에 베팅하기보다 그 품귀가 얼마나 구조적인지, 그리고 선두 기업이 다시 돌아올 유인이 얼마나 큰지를 함께 따져보는 편이 안전하다.

주목할 것: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범용 D램 생산 비중 조정이 실제로 얼마나 이뤄지는지, DB하이텍의 8인치 호황이 중국 레거시 파운드리와의 경쟁 속에서도 이어지는지, 그리고 산일전기가 154kV 초고압 시장에서 실제 대기업들과 경쟁할 만한 트랙레코드를 쌓는지 여부. 세 갈래 모두 '변방의 역습'이 일시적 해프닝으로 끝날지, 구조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을지를 가를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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